┖ ♥ 심리, 성찰, 관계

나의 테두리, 그리고 선입견과 편견 (feat. 호향기님 글 공유)

이전 신사람님의 직장이야기의 글 공유를 한 적 있습니다. 

 

직장이야기 (feat. 신사람님 글 공유)

가끔 방문하는 블로그로 신사람님의 블로그가 있다. 여러 가지로 배울게 많고 스스로 성찰 하도록 도와주는 지혜를 나눠주는 몇안되는 선생님같은 분. 2021년에 직장관련해서 포스팅 했는데 좋

seoul-nba.tistory.com

 

거기서 밑줄 쳤던 구절 중 하나가 아래 와같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일에 대한 나의 편견'은 도전해야할 대상입니다. 
편견을 깬 사람만이 이 시대의 작은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가진 어떤 편견을 깨 볼까'라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호향기님 블로그 보다가 ㅎㅎ

선입견과 편견에 대한 순기능?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글이 있어 공유 합니다. 

 

사실 뭐든 극단적인 것보다 상황과 때에 따라 절적한 균형을 유지할 줄 아는 힘을 길러야 필요가 있을거 같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아는 보편적인 이야기지만,
생명 자체는 "다름"과 같다.

생명의 최소 단위인 세포는
경계(세포막)를 정해놓고 ATP 펌프를 끝없이 돌려서,,
세포막 외부와 세포 내부 물질을 다르게 함으로써 생명 유지(나트륨 농도차=생명)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에너지를 소비해서,
모든 것을 평균으로 혹은 규칙없는 난장판으로 돌리려는 엔트로피 작용에 대항해
그 반대 방향으로 애써야만
생명 유지를 할 수 있다.


"차이=생명"
"같은 것 = 죽음" 인 듯하다.


세포막 내부와 외부의 (나트륨) 농도가 같아져 버리면
세포는 너덜너덜해져 죽어버리고
우리 몸의 성분이 자연계의 성분과 같아져 버리면 우리는 죽게 된다.
(물론 우리가 죽으면 썩고 분해되어, 땅속을 이루는 물질의 평균적인 상태로 수렴하게 된다)

 


조금 철학적인 이야기지만

우리는 태어나서 그리고 죽을 때 까지의 과정은,
마치
비행기가 이륙한 후에 다시 땅위에 착륙하는 과정과 비슷한거 같다.
비행기는 이륙순간부터 착륙순간까지
땅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꾸준히 엔진을 돌려야 한다.

생명 유지도 이와 마찬가지

우리는 평생,
에너지를 써야만, 심장을 뛰게 해야만,
ATP를 이용하여 끝없이 Na-K 펌프를 돌려 세포밖과 세포 안의 나트륨 농도를 다르게 해야만

그렇게 해야만 생명이 유지될 수 있다.
그것이 중단되면 바로 죽게 된다.

이 세상, 이 우주의 모든 것에는
0 으로 돌리는 힘, 모든 것을 평균(난장판 = 섞임)으로 바꾸는 힘이 존재한다.
모든 것을 비슷한 상태로 근본적인 상태로 되돌리려는 힘이다

화산의 분출도,
압력을 견디지 못한 것들이 밖으로 튀어나와 안과 밖의 압력차를 줄이려는 힘에 의한 것이며
지진의 원리도,
판끼리의 이동 사이에서,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판의 끝 부분이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에너지를 방출하기 위해 물리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방향의 힘이
오래전부터 항상 끊임없이 작용해 왔다고 본다면

성악설이 맞을지 성선설이 맞을지는 명확하다

만약
성악설 인간과
성선설 인간이 동시에 존재햇다면

성선설 인간은 죽고
성악설 인간이 적자생존에 따라 살아남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랜덤형태로 되돌리려는,
모든것을 평균으로 맞추려는
그런 힘이 존재하는 자연계에서

그것에 저항하는 것 자체가
세포가 스스로 살기위해 na-k 펌프를 돌리는 것 자체가
외부의 상태에 비해, 스스로만 다른 물질 , 다른 농도로 유지하려는 거 자체가

모두
(주변 환경을 배신하고 스스로만 다르게 존재하기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근원은
이기적인 것이다.

우주 전체 입장에서 보면
디폴트 값은 무생물이다.

지구가 존재하는 이 은하계에서는
(아직까지는) 생명체가 발견되지 않았다.

행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화성이나 수성, 달 처럼,
행성의 표면의 모든 물질이 거의 균일하게 동일한 상태로 평균화 평준화 된 상태가 디폴트 값이다. 설사 차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수억만년 동안 모든 물질은 섞이고 랜덤하게 이동하여 대부분 사막처럼 균일해진다.

그러니까

생명이란
외부환경과 테두리를 정해,
끊임없이 그 안을 외부와 다르게 유지하는 현상이다.

그 경계가
세포벽이든, 세포막이든
아니면 우리 몸의 피부이든
아니면 우리 삶의 "나의 테두리" 경계이든
(도시이든, 국가이든, 지구이든)
상관없다.

테두리를 정해
안과 밖을 다르게 유지하는 것
이것은 생명이 유지되는 근본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20대 말 30대 초에는
사람을 옷으로 판단하지 말자
외모로 판단하지 말자 등
"편견을 없애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사실 능력도 안되는 주제에 나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했다.)

지금은 거꾸로
편견과 선입관이야 말로,
시행착오를 줄이고 나의 시간을 아껴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나의 테두리" 밖에 있는 것에 대해 판단할 때만 그렇다)

내가 진정으로 관심있고 좋아하는 분야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관심있고 좋아하는 사람들 (부모, 가족 그리고 극소수의 몇몇 사람)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관심있고 좋아하는 일

이것까지만 포함하는 테두리를 매우 매우 명확하고 날카롭게 정하고
(이것을 "나의 테두리"라고 이름 짓고 이 안을 사적 영역이라 하자)

그 외 나머지에서는

가차 없이
그리고 무자비하게

편견과 선입관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며 ,
그렇게 해야만
나머지 나의 삶(테두리 안)에 충실할 수 있고 나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럼 혹자는 반박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나의 선입관과 편견으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여기에는 반박이 있다.

하나는

우리 모두가 이미 선입관과 편견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벽에 집에 가는 길에 누군가 바짝 나를 쫓아온다면 매우 불안하고 무섭다.
그런데 내 뒤를 바짝 쫓아오는 사람이,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짧은 치마를 입은 마르고 젊은 여성이라면 "아 같은 아파트 사는 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전혀 무섭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후드를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리고, 덩치가 크며, 반바지인데 종아리에 해골 문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매우 무서울 것이다.

두 번째로는 우리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개인이 세상을 구할 수 없다.

우리가 지나가는 불쌍한 사람을 보고
그에게 연민의 감정으로 돈을 준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구할 수 없다.

개개인 한 명은
권력이 없는 한,
전체 시스템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피터 셍게의 제5경영을 보라)

거꾸로 그가 속한 집단은
그에게 다양한 것(세금, 국방 의무)을 강요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명의 개인은 집단에게 영향을 끼치기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권력 혹은 시스템, 둘 중 하나를 가질 때 만이 가능하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생명의 존재와 사멸 중에

디폴트 값은 사멸이며 무존재이다.

왜냐면
이 세상에는 삼투압 현상, 엔트로피 현상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지구에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평균화 힘, 엔트로피,

그것을 뭐라고 칭하든
그러한 힘에 의해 모든 물질이 수백억년동안 부셔지고 섞인다면

결국
지구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다른 행성표면과 비슷해질 것이다.
(우주의 디폴트 값은 무생물이다)


엔트로피 현상은
모든 자연 물질, 우주 물질을 섞이게 하고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그리고 인위적인 것을 무작위적인 것으로 바꾼다.
삼투압 현상은 농도의 높고 낮음 수량의 많고 적음이 결국 평균화를 이룰때까지 무한하고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디폴트 힘이 깔려있는 3차원의 상태에서
지구,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생명이 ,
80년~100년 짜리 비행을 하면서
어차피 추락(죽음)할 거 조금이라도 더 나중에 추락하려고 버둥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디폴트 값으로 되돌리려는 거대한 힘에 늘 저항해야
그 개체의 생명이 유지되며

이것의 원리를 깨달은 부처는
"인생(삶)은 고통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원리로 보면

인생에서는 고통보다 즐거움이 많을 수가 없으며
슬픔보다 기쁨이 많을 수가 없다.

따라서
성악설과 성선설의 싸움은 처음부터 무의미했다.

사실

"선과 악"이라는 개념 자체도
결국 근본적으로 보면,
"생존의 관점에서 본 선입관"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몸 안의 세포가
생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열심히 펌프를 돌리고 있다면

그리고
그 세포로 이루어진 한 인간도
개체를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열심히 개체 유지에 필요한 활동을 하고 있다면

다시 여기서
그 개체는
자신의 확장을 의미하는
"나의 테두리"를 정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테두리"를 만들고 확장하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의 유지에 필요한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존재는
"없어지는 것"이 디폴트로 가는 상태이며,

비행기는
이륙 후 다시 착륙해야만 하는 것이
그러니까 언젠간 땅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 디폴트 값이다.

인간의 역사가 투쟁의 역사인거처럼
존재의 기억은 고통의 기억이다.
 

 

편견과 선입관은 놀라운 효율을 보여준다.


테두리 외부에서의 사용되는 편견과 선입관은,,

(그 개체가 갖고 있는 테두리 안의 내부 가소성과는 관계없이)

작은 노력에도 지속 가능하다.

게다가 사회의 보편적 상식에 수렴하기 때문에
"테두리 밖의 선입관과 편견"은,
사회적 관념을 통해 (그 결과의 책임에 대해) 보호 받을 수 있다.

선입관과 편견에 있어
"결과가 좋을 확률"이 높냐 낮냐는 중요하지 않다.

최소
51%만 넘는다면
반복시에
그 어떤 것에서도 이익이 생기고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판단의 노력'이 '감정적 노동'이 거의 안들어가기 때문이다. 즉 비용이 0에 수렴한다.)


다만

이러한 선입관과 편견은

내가 아끼는 것, 내가 연구하는 것
혹은
나의 가족, 친지
나의 직업 등

내가 정한 "나의 테두리" 안에서는 사용하면 안된다.
나의 테두리 밖에서만 사용해야 한다.

안에서 사용한다면 실패 시 대가가 크며
그 대가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테두리를 정할 때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도

테두리의 관리가 안되는 사람은
힘에 부치는 사람은
테두리를 줄여 작은 범위에서 시작하는게 좋다.

심지어
능력이 되는 사람조차도
사실 테두리를 넓히기보다는
기존 테두리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의 농도를 높이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경우
인생의 행복과 기쁨은
테두리의 크기보다는
그 안에서의 농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테두리를 작게 만들 지언정
안과 밖에 대한 노력을 그만두면 안된다.

다시
이 글의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면,
세포 안과 밖을 끝없이 다르게 하는 노력이 중단되면 세포가 죽어버리는 것처럼

나의 테두리 안과 밖을
다르게 처리하는 "끝없는 노력"이 중단되면
나의 테두리는 세포처럼 터져 죽고
이 세상은 나 혼자가 된다.

나의 테두리는
내가 쓰는 물건과 사는 집으로 쪼그라든다.


나 혼자가 되면
생물학적으로는 살 수 있지만
감정적 표현과 작동이 어려워지거나 제한된다.

이렇게 되면
(괴짜같은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신이 위축되고
행복도 중단된다.

왜냐하면
인생의 목표, 행복감 모두
감정에서 비롯되거나 파생되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테두리를 명확하게 정하고

그 외부에서
편견과 선입관을 사용하게 되면

감정적 에너지를 아낄수 있고
다양한 사안에 대해 결정까지 걸리는 처리 속도를 매우 빠르게 할 수 있다.

나와 관계없는 것, 먼 것
흘러가는 것, 내일이 아닌 것, 직업적 책임의식이 필요없는 것,
시간이 없으므로 시간을 절약해야 할 때, 빠르게 처리하고 다시는 안볼 것 등에
편견과 선입관을 가차없이 적용해야 한다.

느낌을 믿지 말고 기계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설사 일이 틀어지더라도 그것에 대한 컴플레인, 반품, 취소 등의 후처리도 기계적으로 해야 한다.

 

교보문고 갔는데 데스크 직원이 엄청 불친절하고 띡띡대도 전혀 신경쓰지 말아라.

편의점 갔는데 물건 정리하는 직원이 "네 계산해 드릴께요"라고 불친절하게 말만 하고, 계산해주지 않고 "물건 정리"를 2-3분 더 해도 화내지 말아라.

 

편의점에서 물건 값을 붙여 놓지 않아서 물어봤더니 "그거 가격 알려면 여기서 찍어봐야 해요. 갖고 오세요." 라고 해서 갖고 갔는데 너무 비싸서 그 옆에 싼 거 결제하겠다고 했더니 "두개 중 안사실거는 원래자리에 갖다 놓으세요" 라고 해도 화내지 말아라. 편의점에 들어간 목적을 최단 시간에 달성하고, 밖으로 나와라.

 

감정을 소모하지 말아라.

그들은 모두 당신의 테두리 밖에 있을 뿐이다.

 
생전 처음 가보는 지방 기차역 근처에서 우동을 먹을때
가장 크고 깨끗한 집이 위생적일 가능성이 높다.

새벽에 누군가 내 뒤를 쫓아올 때
힐을 신은 마른 여성이라면 나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적다

수많은 사람들이 맛있다고 한 집은
재료는 속일수 있어도 위생은 속일수 없다.

어떤 취미를 처음 시작할 때
일단 그 취미가 "내 테두리"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제품으로 도구를 준비하는 것이 실패 확률을 줄일 수 있다.

이 모두 뻔한 상식이며 루틴이며 선입관이며 편견에 속한다.

모든걸 이런식으로 처리하면 사는게 재미가 없다고?


재미와 행복은
"나의 테두리" 안에서 찾는 것이다.

밖에서 찾지 말자

테두리 안과 밖을 잘 구별하여

내 가족 내 부모형제, 그리고 내 친구 극소수,
나의 진심 취미,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특정 음식,
생활 용품 중 내가 관심이 있는 몇 종류의 물품(지갑 & 가방)

이런식으로 정한 (예시일뿐이다)
나의 테두리 안에서는,
선입관과 편견을 버리고 결정하자


그러나

선입관에는 보편적인 선입관과 주관적인 선입관 두개가 존재한다.

두개다 좋다.
테두리 밖에서는 두가지를 모두 마음것 사용하자

주관적 선입관은

예를 들면

업체를 고를땐 대형이 유리하고
일을 시킬땐 착한사람보다는 독한사람이 낫다.

평타 이상이라면 새로운 업제보다는 했던 업체가 사고발생 리스크가 낫다
거래처 누군가가 일을 잘처리하면, 모든 연결 통로는 그에게만 고정한다.
어떤 은행지점에서 일을 망쳤다면 (직원이 2년후 순환되더라도) 다시는 그곳에 가면 안된다.

등등

보편적인 선입관이 아니라 주관적 선입관이더라도
바보같은 반복이라도 , 그 누군가가 비웃더라도,

개의치 마라

내 선입관을 깰만한 논리, 증거가 나오기전에는 그만두면 안된다.


그 누가 비웃더라도
나는 내가 하던대로 했다.

비웃는 사람이 틀렸고 역시 내가 맞았다고 한다면
비웃는 사람은 아무런 책임도 없다. 아니면 말고 라는 태도
(사실 그 사람은 나중에 기억도 못한다)

그러나
비웃는 사람에게 휩쓸려
내가 방식을 바꾸었다가 낭패를 당하면,

이 경우도 어쨌든
비웃는 사람은 아무런 책임도 없다.
하지만 내가 지불할 대가(판단기준에 대한 대가)는 엄청나며
가장 뼈아픈 것은 그 고생에도 아무런 피드백도 얻을 수가 없다는 것.

그러니까

테두리 밖에서는
결코 감성적인 흐름에 휘둘리면 안된다.
감정을 빼야 한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면 그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
테두리 밖에서 행동할때는
늘 그 목적을 되내어야 한다. 그 목적을 입에 달고 중얼거려야 한다.
그리고 그 목적에 맞는 선입관과 편견을 (감정없이) 적용시켜야 한다.

편견과 선입관은
테두리 밖에서
의도했던 목적으로 가는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진다면

나의 친구이며
무기가 된다.

동시에

수없이 스쳐 흘러가는 테두리 밖의 감정적 격동에
내가 휘말리지 않고

따라서
감정적 에너지 소모도 하지 않을 수 있다.

테두리 밖의 많은 (중요하지 않은) 일들은
선입관과 편견을 사용하여 감정없이 빨리 해치워버려라


테두리 밖의 효율이 올라가서
그로인해 시간과 돈이 생기면
테두리 안으로 들어와
테두리 안의 것들(혹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즐겨라

이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주변에 별로인 상황과 사람에 둘러쌓여 있다면

불평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그 상황을 바꾸던가 아니면 빠르게 그 상황과 환경으로 부터 나와야 한다. 

어떻게 보변 나의 테두리 밖의 상황이다. 

감정을 쓸 필요도 없고 의미 부여할 필요없다. 

 

빠르게 선입견과 편견으로 처내면 그뿐이다. 

 

또 좋은 글 있으면 공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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